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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12성문(14성문) 종주

Tongjimi Musima~ 2009. 10. 20. 02:06

● 북한산 12성문(14성문) 종주

 

1.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의 &joy]13km 8시간 북한산성 12성문 일주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얼음처럼 빛나고,/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가장 높은 정신은/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은/얼음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빛을 받들고 있다.

<조정권 ‘산정(산정)묘지1’> 》

겨울 문턱. 북한산은 뼈만 남았다. 우뚝우뚝 바위만 남았다. 서울은 북한산과 한강 사이에 있는 거대한 돔구장이다. 본부석은 바로 북한산.

그곳에서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의 3개 돌기둥이 북쪽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북한산을 삼각산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왕궁인 경복궁은 본부석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북한산은 백두산, 묘향산, 금강산, 지리산과 함께 한국의 5대 명산.

종로나 광화문에서 북한산을 바라보면 본부석 쪽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이 보이고,

그 뒤로 뾰족하게 삼각머리를 내밀고 있는 보현봉(714m)이 눈에 들어온다. 보현봉은 목을 앞으로 쭉 빼고 북악산 너머로 서울 시내를 넌지시 엿보고 있다.

그래서 엿볼 ‘규()’자를 써서 ‘규봉()’이라고도 한다. 보현봉은 만경대의 정남향.

산행 코스 대서문∼대남문 대남문∼위문 북문∼대서문 3부분으로 나뉘어

돔구장엔 반드시 보조경기장이 있다. 서울 안에서도 ‘숨겨놓은 장안’이 있다. 본부석 뒤쪽에 있는 ‘북한산성’이 그것이다.

유사시 도성이 함락되면 왕은 경복궁을 버리고 이곳에서 비상집무를 하게 된다. 성안 넓이도 약 200만 평(6.6km²)으로 여의도(89만 평)의 2.25배나 된다.

4대문으로 둘러싸인 한양도성 약 232만 평(7.66km²)에 비해서도 결코 좁지 않다.

북한산성 한 바퀴는 총 12.7km. 하지만 등산 코스는 산성을 우회하는 곳도 있으므로 13km가 넘는다.

산행 시간은 8시간 안팎. 산성은 약간 찌그러진 왕관 형태다. 크라운 관전면 삼각뿔이 바로 북쪽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이다.

보통 북한산성 산행은 북한산성 입구(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1번 출구∼704번 간선버스∼산성입구 하차)에서 시작한다.

방향은 시계 반대 방향. 왼쪽에 심장이 있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심장 안쪽으로 돌게 마련. 육상 트랙이 그 좋은 예다. 코스는 크게 3부분으로 나뉜다.

대서문∼대남문의 의상능선과 대남문∼위문의 산성주능선, 그리고 북문∼대서문의 원효능선.

의상능선이 가장 힘들다. 하지만 그만큼 경치가 빼어나다. ‘작은 공룡능선’이라고도 할 정도로 바위길이 많다.

의상봉∼용출봉∼용혈봉∼증취봉(시루봉)∼나월봉∼나한봉∼문수봉 등 7개의 암벽 봉우리를 차례로 넘는 맛이 쏠쏠하다.

초겨울 약간 차가워진 바위를 잡는 손맛도 짜릿하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의상-원효봉이 정겹다. 의상은 원효 보고 웃고, 원효는 의상 보고 웃는다.

출발지점인 대서문에선 왼쪽부터 원효봉 염초봉(영취봉)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 용암봉이 차례로 보이다가, 의상봉 쪽으로 갈수록 인수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노적봉의 육중한 암벽이 발군이다.

위문∼북문 너무 위험해 출입통제. 계곡방향 대동사로 돌아가야...

산성 주능선은 호젓한 데이트 코스. 가끔 낙엽 깔린 숲길도 있다. 용암문∼위문 코스가 압권이다. 우뚝 솟은 노적봉이 갑자기 나타나고, 오른쪽엔 만경대가 서 있다.

두 돌기둥을 잇는 바위길이 우렁우렁하다. 노적봉의 뒤통수를 지나 오른쪽 만경대의 허리를 쇠 난간에 의지하여 돌아나간다.

왼쪽 밑은 천길만길 수직 암벽. 아슬아슬하고 발바닥이 간질간질하다. 위문∼북문 코스는 북한산성 계곡 쪽으로 방향을 틀어 ‘약수암∼대동사∼북문’으로 가야 한다.

‘위문∼백운대∼영취봉∼북문 코스’는 너무 위험해 통제구간이다. 인명사고도 잦다.

백운대까지 올랐을 땐(왕복 30분) 다시 위문으로 돌아 나와 약수암 쪽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북한산 바위들은 ‘단호한 침묵’으로 묵언정진을 하고 있다. 뼈만 남은 몸으로 눈을 감고 있다.

바람이 간질여도 꿈적 않는다. 새들이 똥을 누고 가도 말이 없다. 북한산은 미륵부처다. 미륵보살이다.





▼1711년 병자호란 직후 완공… 한양도성의 축소판▼

북한산성엔 15개 성문이 있다. 대서문, 대남문, 대동문, 북문, 대성문 등 5개의 큰 문과 가사당암문, 부왕동암문, 청수동암문, 보국문(동암문),

용암문, 위문(백운동암문), 서암문(시구문) 등 7개의 암문()이 있다.

암문은 ‘그늘 문’ 즉 비상출입문. 큰 문은 누각이 있고 출입구도 아치형이지만 암문은 누각이 없고 모양도 사각형이다.

큰 문 중에서도 대성문이 가장 크다. 그것은 경복궁에서 임금이 지름길로 산성에 오르는 문이기 때문.

대서문과 서암문 사이를 흐르는 북한산 계곡에는 수문을 쌓아 적이 못 들어오게 했다. 지금은 그 터만 남았다.

행궁을 이중으로 방어하기 위해 대서문 훨씬 안쪽에 내성과 중성문도 쌓았다. 그 옆 협곡에는 수문을 하나 더 만들었는데 흔적만 있다.

 


 


현재의 북한산성은 정묘 병자 두 호란 직후인 숙종 37년(1711년) 4월에 공사를 시작해 그해 10월에 완공했다.
성 안의 시설까지 완공하는 데는 2년이 더 걸려 1713년 가을에 비로소 끝났다.

북한산성은 한양도성의 축소판. 임금이 묵을 행궁과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터가 있고 지휘본부 장대()도 있었다.
남장대 북장대는 터만 있고 동장대는 최근에 복원했다. 당시 산성 안엔 사찰 12개, 우물 99곳, 저수지 26곳이 있었다.
이 중 터만 남은 중흥사는 김시습이 청년 시절 묵으며 백운대를 오르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태조 이성계는 산성 밖에 있는 진관사를 자주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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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한산 12성문(14성문) 자료 

 

지 정 번 호 : 사적 제162호

▒ 지정연월일 : 1968년 12월 5일

▒ 시        대 : 조선시대

▒ 규모 · 양식: 543,795㎡ 석축

▒ 재        료 : 석조기단, 목조

▒ 소   유   자: 국유

▒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 1-1 외, 서울특별시

                   은평구,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일원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때 한성의 관망을 위해 도성을 축조하고, 그 방어 효과를 높이기 위해 삼각산에 산성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북한산성이란 이름은 ≪삼국사기≫에 백제 개로왕(蓋鹵王) 5년(132)에 이미 나타나고,

신라는 이곳의 비봉(碑峰)에 진흥왕(眞興王)이 순수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진평왕(眞平王) 25년(603)에는 고구려 장군 고승(高勝)이 북한산성을 포위 공격하자 왕이 1만명의 군사로 구원한 기록이 있고,

661년에는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군과 함께 북한산성을 20여일간 포위 공격하자 성주이던 동타천(冬陀川)이 성안의 주민

2, 800명과 함께필사의 결전으로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북한산성은 오늘날의 성곽으로 둘러싸인 북한산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한산성(漢山城)

즉 한산 지역의 북쪽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한편 11세기 초 거란의침입이 있자 고려 현종(顯宗)은 고려 태조의 재궁(梓宮)을 삼각산에 옮겨왔다.

고종(高宗)19년(1232)에는 삼각산에서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으며, 우왕(禑王) 13년(1387)에는 삼각산에 중흥산성(重興山城)을 쌓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의 외곽 산성을 마련하자는 축성론(築城論)이 일어나

효종 10년(1659) 송시열(宋時烈)에게 명하여 수축하게 하고, 숙종37년(1711))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가 시작되었다.

그 해 4월에 착수한 이 공사는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3군문이 담당하였고,

그 아래 각 군문에는 책임 감독관으로 낭청(郞廳)을 두었으며, 또 그 아래에 내책응(內策應)·외책응(外策應)·독책장(督策將)을 두었다.

공사별로 부석패장(浮石牌將), 축성패장(築城牌將), 수구패장(水口牌將), 운석패장(運石牌將), 치도패장(治道牌將)과 이장변수(泥匠邊首),

야장변수(冶匠邊首), 석수변수(石手邊首), 목수변수(木手邊首) 등으로 공사를 감독하도록 하였다.

축성에 필요한 노동력은 3군문의 군사는 물론 서울의 주민과 승려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 모역군(募役軍)과 각종 공장(工匠)이 동원되었다.

서울의 주민은 경상가(卿相家) 이하 각 호(戶)를 대·중·소로 구분하여 대호는 3명, 중호는 2명, 소호는 1명씩 식량을 지참하고 취역에 나섰으며,

모역군은 한 달에 쌀 9두와 면포 2필씩이 지급되었다. 이때 이룩된 것이 오늘날의 북한산성이다.

 

약 6개월에 걸쳐서 완성을 보게 된 북한산성의 성기(城基)는 보현봉·만경대·백운대·원효봉·대서문·의상봉·증취봉·나한봉 등을 연결하는 선으로

길이는 모두 7, 620보, 즉 21리 60보가된다.

그 중에서 수문(水門) 북변에서 용암(龍岩)까지의 2, 292보는 훈련도감이, 용암 남변에서 보현봉까지의 2, 821보는 금위영에서,

수문 북변에서 보현봉까지의 2,507보는 어영청에서 각각 담당하여 쌓았다.

성문은 모두 13개로 수문 북변에서 용암까지 사이에 수문(높이16척, 폭 50척), 북문(높이 11척, 폭 10척), 서암문(西暗門, 높이 7척, 폭 7척),

백운봉암문(높이 6척 3촌)이 있고, 용암 북변에서 보현봉까지 사이에 용암봉암문(높이 6척 5푼, 폭 7척 5푼), 대동문(大東門, 높이 9척, 폭 10척),

보국문(輔國門, 높이 6척 6촌, 폭 6척 5촌),대성문(大成門, 높이 13척, 폭 14척)이 있으며,

수문 남변에서 보현봉까지 사이에 대서문(大西門, 높이 11척, 폭 13척), 청수동암문(높이 7척, 폭 7척), 부왕동암문(높이 9척, 폭 8척),

가사당암문(높이 7척, 폭 7척), 대남문(大南門, 높이 11척, 폭 11척)이 있었다.

 

축성이 끝난 후 숙종 38년(1712) 10월에 이르러서는 북한산성의 주관부서로 경리청(經理廳)을 설치하고, 여기에 도제조와 제조관을 두었다.

행궁(行宮)의 수호ㆍ관리는 관성장(管城將)이 맡았으며, 수

성장병(守城將兵)으로는 대성문ㆍ동문ㆍ 서문에 수문장 각 1인과 갑사둔(甲士屯), 점암둔(點岩屯)에 둔장 각 1인을 배치하였고,

수첩군관(守堞軍官)은 266인, 별파진(別破陣) 200인, 아병(牙兵) 635인이 항상 거주하였다.

그 후 영조 23년(1747)에는 총융청(摠戎廳)으로 하여금 관리토록 하였고, 이듬해에는 상원봉(上元峰) 아래에 130칸의 행궁과

140칸의 군창(軍倉)을 지었다.

성내에는 승군(僧軍)을 위한 136칸의 중흥사(重興寺)가승군 총섭(摠攝)이 있는 곳이었고, 이 밖에도 11개의 사찰과 2개의 암자가 있었다.

성안에는 8개소의 창고가 있었으며, 99개소의 우물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

현재 성의 둘레는 12㎞, 성 안의 면적은 200여만평으로, 성벽은 아직도 잘 남아 있는 부분이 많다.

성곽의 여장은 허물어졌으나, 현재 대서문이 남아 있고 장대지(將臺址)·우물터·건물터로 추정되는 방어시설의 일부가 남아 있다.

1990년부터 훼손된 동장대·대남문·대성문·대동문·보국문과 성곽들을 보수·복원하여 거의 완공 단계에 있다.

 

▲12성문 종주의 개념

12성문 종주란 북한산성 능선상의 12성문을 종주 하는 산행을 일컫는다.

북한산성 안의 성문은 모두 14개, 원효능선상에 시구문(서암문), 북문 등 2개의 성문이 있고

주능선상에는 위문(백운봉암문), 용암문(용암봉암문), 대동문, 보국문, 대성문, 대남문 등 6개의 성문이 있으며 의상능선 상에는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대서문 등 4개의 성문이 있다.

또한 계곡에 중성문과 수문이 설치되어 있다. 코스를 약간 복잡하게 잡으면 14성문종주도 가능하지만 능선상의 12성문만을 산행 대상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첫번째-시구문

정확한 본래 이름은 서암문(西暗門)으로 대서문 북쪽, 수문(水門)에서 원효봉으로 오르는 해발 180m 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안에서 생긴 시신을 내보내던 문이라 하여 주민들에게 시구문(尸柩門)이라고 불리웠고 이 이름이 원래 성문이름인 서암문(西暗門)을 대신하여

고착화(?) 되어 현재도 성문에 '시구문'이라 쓴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두번째-북문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북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으로 원효봉(元曉峰)과 영취봉(靈鷲峰-현재 염초봉의 본래 이름)

사이의 해발 430m 지점 안부(鞍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는 문루(門樓)가 폐기되어 없어진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 문루(門樓)는 성문 위에 지은 다락집으로 유사시 장수의 지휘소가 되며 성 밖의 적을 조기에 발견하고자 감시하는 기능을 가진 건축물입니다

 

▲세번째-위문

정확한 본래 이름은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으로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의 안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위문(衛門)이라 일컫고 있는데, 일제시대 때부터 그렇게 불리어 왔다고 합니다.

 

▲네번째-용암문

정확한 본래 이름은 용암봉암문(龍巖峰暗門)으로 무인대피소인 지금의 북한산장 부근 용암봉 기슭 해발 58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과거 이 일대의 수비를 담당하던 용암사(龍巖寺)가 부근에 있었답니다.

 

▲ 다섯 번째-대동문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동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으로 우이동 진달래능선이 끝나는 해발 54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문은 1993년에 문루(門樓)를 갖추는 등 화려하게 복원되었습니다.

 

▲ 여섯 번째-보국문

정확한 본래 이름은 동암문(東暗門)으로 대동문과 대성문 사이의 해발 567m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아래에 보국사(輔國寺)가 있었다고 하여 지금은 보국문(輔國門)이라 불리우고 있습니다.

 

▲ 일곱 번째-대성문

보현봉(普賢峯)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산성 능선 해발 625m 지점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서 가장 큰 문입니다.

원래 처음에는 소동문(小東門)으로 불리우는 작은 암문(暗門)이었으나 성문 위치가 문 북쪽 기슭 행궁(行宮)이 있는 곳에서 이곳을 통과하여

형제봉과 보토현(輔土峴-현재 북악터널 위쪽)을 경유하여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편리한 코스에 위치하고 있어서

임금이 이문을 출입하게 됨으로써 뒤에 성문을 더욱 성대하게 개축하여 임금이 출입하는 성문으로 위용을 갖추고

이름도 대성문(大城門)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 추측된답니다.

 

※ 행궁(行宮)이란 임금이 국도(國都)의 왕궁 밖에서 머물던 별궁(別宮)으로 북한산성 내 행궁은 산성을 축조하던 조선 숙종37년(1711년)에 지어졌답니다.

    북한산성중에 제일 큰문이며 왕이 출입하던 문이라 역시 장엄하다.

 

▲ 여덟 번째-대남문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남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으로 처음 축조 당시는 문수봉암문(文殊峯暗門)으로 불리웠던 성문입니다.

해발 715m 의 보현봉(普賢峯)과 해발 727m 의 문수봉(文殊峯)이라는 두 거봉을 잇는 해발 663m 능선 한가운데 안부(鞍部)에 위치 해 있습니다.

 

▲ 아홉 번째-청수동암문

문수봉(文殊峯)과 나한봉(羅漢峯) 사이 해발 694m 에 위치한 성문으로 산성주능선과 의상능선 그리고 비봉능선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있습니다.

 

▲ 열 번째-부왕동암문

나월봉(蘿月峯)과 증취봉(甑炊峯) 사이 산 능선 해발 521m 지점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의 7개 암문(暗門)중 가장 규모가 크고

정식 홍예(虹霓)는 아니지만 위쪽 성돌을 둥글게 파서 홍예문(虹霓門)처럼 만든 아름다운 성문입니다.

최근까지 성문 우측에 '소남문'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듯이 이 암문(暗門)은 처음에는 소남문(小南門)으로 불리웠던 것으로 추정되며

근처에 원각사(圓覺寺)가 있었기 때문에 원각사암문(圓覺寺暗門)이라고도 불리우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부왕동(扶旺洞)이란 이름은 성안 동쪽에 있는 부왕사(扶旺寺)로 내려 가는 계곡 일대를 일컫던 이름으로 보입니다.

 

※ 홍예(虹霓)란 성문 얼굴의 윗머리가 무지개같이 반원형(半圓形)이 되게 만든 구조물 또는 그러한 구조로 만든 문 즉, 홍예문(虹霓門)을 말합니다.

 

▲ 열한번째-가사당암문

의상봉(義相峯)과 용출봉(龍出峯) 사이 산능선 해발 488m 지점에 위치한 성문으로서 부근 산성안에 국녕사(國寧寺)가 있다고 하여

국녕문(國寧門) 또는 국령사암문(國靈寺暗門)으로도 불리웠답니다.

 

※ 암문(暗門)이란 노출을 꺼리는 출입통로로 출입문위에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몰래 출입 할 수 있도록 만든 문입니다.

    성안에 필요한 병기 및 식량등을 운반하고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극비리에 구원을 요청하거나 적을 역습할 때 이 통로를 사용한답니다.

    참고로 현재 북한산성에는 모두 7개의 암문(暗門)이 남아있습니다.

 

▲ 열두번째- 중성문

원효봉(元曉峯)과 의상봉(義相峯)을 직선으로 그은 중간 지점에 해당되는 현재 산성주차장 일대에서 산성안 중심부에 위치한 중흥동 계곡을 향하여

오르는 중간 지대 길목에 위치한 성문입니다

중성문(中城門)은 1998년 문루를 올리고 성벽도 말끔히 복원됐습니다.

 

▲ 열세번째-대서문

의상봉(義相峯) 서북쪽 해발 150m 높이의 낮은 구릉지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 성문 중 동서남북, 4개 방위중 서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인 동시에

북한산성의 정문(正門)입니다.

지금의 문루(門樓)는 1958년에 당시 경기도 지사였던 최헌길이라는 분의 주도로 복원된 것이라고 합니다.

 

▲ 열네번째-수문

대서문 북서쪽 근처 산성계곡에 있었던 폭 50척(15.5m)에 높이 16척(5m)인 큰 규모의 수문(水門)으로 1925년 8월 을축년대홍수(乙丑年大洪水)때

성돌과 장대석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유실되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수구정이라는 음식점에서 보이는 시구문과 대서문으로 오르는 계곡 양옆 산비탈에 남아있는 성곽의 흔적만이 이 두 성곽 사이의 협곡에

웅장했던 수문(水門)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할 뿐입니다.

 

※ 성곽의 배수를 위한 시설로 규모가 크고 문의 형식을 갖춘 경우

    수문(水門)이라고 하고 규모가 작은 것을 수구(水口)라 합니다.

    현재 수문터 아래 수구정이라는 식당이 있습니다

 

 

 

*14성문 종주시 샘터

1) 부왕동암문 왼쪽 밑으로 20m 아래에 샘터

2) 대남문에서 아래 문수사
3) 대동문 밖으로 나가서 40m정도 아래 샘터(갈수기엔 잘 안나옴)

4) 북한산 산장 샘터

5) 약수암 바로 위에 샘터

6) 원효봉에서 시구문으로 내려가는 중간에 있는 원효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