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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門서 華岳까지](21)무적천(舞笛川) 변전사

Tongjimi Musima~ 2010. 6. 8. 15:56
[雲門서 華岳까지](21)무적천(舞笛川) 변전사
한때는 조선 솥 70% 생산, 청도 '속계솥' 명성 날렸는데…
 
 
지룡능선 복호산 아래 문명분교에서 어린이날을 하루 앞두고 열린 운동회. 조선시대부터 용선공업이 발달하면서 부가 축적되고 그 덕분에 어느 곳 못잖게 일찍 사립교육이 시작됐던 역사의 증언자다. 일대에서 청도 최초의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도 그 영향이었으며, 분교 교정에는 그 기념관이 건립돼 있다.
  운문분맥 북편 청도 땅을 흐르는 물길이 동창천임은 누구나 알 만하다. 그럼 그 남쪽을 흐르는 하천은 무엇일까?  밀양 산내면(山內面) 지역을 관통하는 ‘동천’(東川)이다. 이보다 더 남쪽으로는 밀양 표충사 계곡의 ‘시전천’이 흐르다가 보다 큰 ‘단장천’에 합류한다. 그 두 하천을 가르는 분수령은 가지산 아래 능동산서 출발해 재약산(천황산)~도랫재~정승봉~정각산으로 이어가는 산줄기다.

  이 재약산~정승봉 분수령서 주목할 것은 ‘도랫재’(해발 520m)다. 이 재에서 60도 방향으로 총 네 산줄기에 걸쳐 네 개의 재가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어서다. 둘째는 가지산~운문산 사이 아랫재(723m), 셋째는 지룡능선 배너미재(508m), 네 번째는 문복능선 수리덤산~옹강산 사이 심원재(449m)다.

  이 재들을 길목 삼아 걷는다면, 경주 산내면서 심원재를 넘어 삼계계곡에 이르고, 배너미재를 넘어 천문동에 도달하며, 아랫재를 넘어 밀양 시례에 닿아, 도랫재를 넘어 바로 표충사 계곡으로 들어선다. 경주 일부리와 밀양 구천리 사이가 거의 일직선으로 연결돼 겨우 60리 거리(평면 기준)로 축지(縮地)되는 것이다.

  이 희한한 자연현상을 두고 밀양·경주·청도가 별차 없이 공유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게 옛날 옛적 홍수시대 뱃길이라는 것이다. 듣다보면 정말 그때의 실제 경험이 인류 집단무의식 속에 뿌리 깊게 새겨진 것 아닐까 싶어진다. 빙하기가 끝나면서 홍수가 났던 것일까? 깊은 산일수록 홍수나 배와 관련된 지명과 전설이 많은 걸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대구권 팔공산 동록(東麓)의 신원마을에 있는 ‘배안골’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스며 있다. 지명기록원이 그 이름을 납득 못해 ‘배암골’로 임의 해석해 국가기본도에다 적어 넣은 게 이해될 성도 하다. 홍수시대에 배를 매던 곳이라 해서 산꼭대기 암괴가 ‘배바위’라 불리고 그에 따라 그 산 전체가 ‘주암산’(舟岩山)이라 불리는 경우도 있다.

  운문분맥 일대에서는 그렇게 큰물이 져 온 산이 다 물에 잠기고 꼭대기만 조금씩 남았을 때 그 모양에 따라 산 이름도 정해졌다고 했다. 옹기만큼 남았으면 ‘옹기산’(옹강산, 문복능선), 종지만큼 남았으면 ‘종지산’, 북만큼 남았으면 ‘북바위봉’… 하는 식이다. 참으로 낭만적인 이야기다. TV나 들여다보고 있는 요즘 시대에야 꿈도 못 꿀 상상력의 소산일 수 있다. 종지산은 운문사서 금천으로 나올 때 호수 건너편으로 정면 대면케 되는 오진리 입구(서편) 돌출봉이다.

  하지만 운문분맥에는 슬프고 가슴 에이는 역사도 함께 있다. 고려시대 농민항쟁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1193년 광범하게 폭발한 경상도 항쟁이 운문분맥 일대를 근거지로 그 후 10년간이나 지속됐다. 옷조차 변변찮던 시절 그 깊은 산속에서 그 긴 세월을 버틴다는 것은 살인적인 생존환경과 대결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절망감이 얼마나 무겁고 힘겨웠을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진다.

  우직한 농민군은 아마도 기본 생존권만이라도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을 터이지만 국가는 그들을 敵(적)조차 못되는 ‘도적’(雲門賊)으로 몰았다. 봉기 주동자 김사미는 관군의 잔꾀에 속아 살해됐고, 후속 지도자였던 패좌(?佐)는 하산길에 피살됐다. 나머지 농민군인들 목숨이나 부지했을까. 그럴 때 토벌군에 앞장섰던 이규보(李奎報)가 쓴 편지에 “운문산 송이버섯을 구워먹으니 맛이 좋다”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굶다시피 하며 살았을 농민군과 왠지 대조되는 모습이다.

  자연 계절이 그러하듯 인간세상 또한 돌고 도는 것, 그 이후 운문분맥 동네에는 큰 호사(好事)가 찾아들었다. 탄소가 많이 들어 무른 무쇠(銑鐵)를 녹여 솥을 만드는 용선(鎔銑)공업이 그 깊은 산 속에 둥지 튼 것이다. ‘무적천’(舞笛川) 주변이 입지였다.

  무적천은 운문천(운문사계곡)과 신원천(삼계계곡) 물이 합쳐 이루는 더 큰 물길이다. 신원리 문명분교 부근서부터 동창천 합류점까지, 즉 지금의 운문호까지가 무적천이다. 앞서 살핀 동편 문복능선과 서편 호거능선으로 둘러싸였다. 풍광이 매우 빼어나, ‘병풍바위’ 등 물가에 둘러선 암벽들과 내 바닥의 장난감 같은 조약돌들이 여전히 많은 행락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옛날에는 여기서 나는 은어회가 왕실까지 진상됐다는 얘기도 들렸다.

  ‘무적’이라는 이름은 문명분교 뒤에 있는 ‘무적산’에서 유래했을 테다. 춤과 피리를 가리키는 한자로 조합돼 무척도 풍류가 느껴지는 이름이다. 산 북편 들도 ‘무적들’로 불린다. ‘무적’은 때로 ‘무지개’로 변음 되는 바, 호거능선을 살필 때 본 ‘무지개산’이란 이름도 그런 경우일 수 있다.

  무적천변에 언제 솥 공장들이 들어섰는지 구체적으로 검증한 연구결과는 만나지 못했으나, 서기 1800년 이전에 이미 터를 잡았다는 설명이 보인다. 1850년에 현지를 유람한 김상은(金尙殷)은 “솥과 번철 화로를 만드는 것이 제법 볼만했다”고 써 놨고, 1888년 찾았던 이호우(李浩祐)는 밤에 솥 만드는 광경을 보고 직접 묘사해 두기도 했다. “이 마을은 솥 만드는 곳으로 나라에 이름이 높다. (용광로)불빛은 하늘에 닿고 들끓는 사람들의 얼굴은 푸른빛이다. 쇳물 쏟아져 나오는 것이 대나무 홈통으로 물을 받아 그릇에 채우는 것 같다. 가마를 앞뒤서 나란히 들어 몇 말 크기의 거푸집 솥발 구멍으로 쇳물을 부어 넣는다”고 했다.

  여러 증언과 청도문화원이 만든 ‘마을지명유래지’(1996)의 서술 등에 따르면, 이 무적천 유역에서는 한때 전국 솥의 70%가 만들어졌다. 최상류 신원리, 그 아래 오진리, 더 하류 방음리 등이 그 터전이었다. 현지 어르신들이 목격하고 기억하는 최근세의 공장만도 신원리에 3개, 방음리에 2개나 됐으며, 오진리에도 있었다. 여기서 생산된 솥은 많을 경우 연간 1만8천여개에 달했다. 신원리 삼거리에 자리한 중심마을 이름을 따 ‘속계솥’이라 불렸으며, 입이 작고 몸체는 커 ‘옹달솥’이란 별명도 갖고 있었다.

  거대한 ‘속계솥 주물(鑄物)단지’는 많은 인력을 필요로 했고, 엄청난 액수의 임금을 살포했다. 전국을 돌며 쇠를 모아오는 사람이 있어야 했고, 특수한 흙을 모아 봄부터 거푸집을 만들어 둘 사람도 필요했다. 쇠를 녹이고 거푸집을 데우는데 들어가는 굉장한 양의 땔감 준비에는 더 많은 일손이 필요했다. 준비가 끝나 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가장 바람직한 온도로 불을 땔 기술자가 있어야 하고, 풀무를 밟아 바람을 불어넣을 장정들이 소용됐다. 펄펄 끓는 용광로에다 쇳조각들을 기술적으로 던져 넣을 사람, 이루어진 쇳물을 밖으로 이끌어낼 기술자… 등등해서 필요한 인력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외지에서 일꾼들이 찾아들고, 솥 중개인이 줄을 서는가 하면, 이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여각이 생겨나고, 결국엔 더 멀리서 공연패가 찾아들기까지 했다. 신원리가 한때 400호가 넘는 큰 마을로 확장된 것은 그래서였다. 덩달아 경산 자인시장도 호사를 누렸다. 속계솥이 전국으로 퍼져가는 주 중계지가 거기였다. 운문과 자인시장 사이의 최단거리 코스였던 비슬기맥 상의 ‘곱돌이재’도 자연스레 함께 부산스러워졌다.

  운문 땅의 경제적 호황은 그곳 사람들로 하여금 일찍 개화하고 일찍 신교육에 눈 뜨게 했다. 청도 전역에서 가장 먼저 사설 ‘문명학교’가 설립된 게 그 증거다. 역시 역내 최초로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른 연유도 그것이었다. 지금의 70대 후반 어르신 중 상당수도 외지 중고교 유학생 출신이다. 깊은 산촌의 일이라 믿기 어렵고, 평야지역 농촌과 비교해도 훨씬 앞선 교육열이라 봐야 할 테다.

  어쩌면 ‘운문면’이 탄생한 데도 저런 경제적 기반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본래 이 땅 중 상당 면적은 청도도 아닌 밀양 소속이었다. 전혀 동떨어진 관계지만 그렇게 관리되고 있었다. 그런 땅은 대개가 수탈의 대상이었다. ‘날아 들어온 땅’라는 뜻에서 학술용어로 ‘비입지’(飛入地)라 부르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이 밀양 땅과 경주·영천의 일부를 모으고 청도 ‘동이위면’(東二位面)의 4개 마을을 합쳐 1910년에 만든 것이 운문면이다.

  그러나 그 80여년 뒤 운문면은 어렵사리 모았던 여러 마을을 다시 잃었다. 1990년대 초 운문댐이 건설돼 호수가 생겼기 때문이다. 무적천변의 방음리부터 절반 이상을 떼였다. 그 아래 순지(蓴池)·서지(西芝)가 수몰됐고, 200호나 됐던 면소재지 마을 대천리(大川里)까지 사라졌다. 선사시대 일대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풍광이 특별했던 공암리(孔岩里)도 거의 뜯겼다. 말하자면 운문면의 중심부를 잃은 것이다.

  운문면의 운명이야말로 ‘기구하다’는 표현에 썩 어울린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없던 게 생겼다가 다시 물에 묻혔으니 그 기구함을 어디다 댈 것이며, 도적의 땅으로 토벌 당하고 수탈의 땅으로 비입지가 됐다가 근대 주물공업의 기린아로 솟았으니 그 또한 기복이다. 빨리 개화했다가 만세운동으로 철퇴를 맞았고 좌우대립 때 또 치유하기 힘든 상해를 입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할 것인가. 이게 다 운문분맥이라는 거대한 산체(山體)에 깃들어 맞은 인연들일 터이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출처 ☞ [대구 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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