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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門서 華岳까지](18)신원천 삼계계곡

Tongjimi Musima~ 2010. 6. 8. 15:59

 

[雲門서 華岳까지](18)신원천 삼계계곡
청도 특산품 속계솥, 전국 솥 생산량 70% 차지
 
 
 
지난번 본 지룡능선은 신원천 계곡의 서편 울타리다. 그 계곡의 동편 울타리 역할은 이미 살핀 대로 문복능선이 맡았다. 두 산줄기가 호응해 신원천 삼계계곡이라는 독립 권역을 형성한 것이다.

흔히 삼계계곡은 신원리 두 계곡 중 운문사계곡보다 훨씬 작은 줄 생각하기 십상이다. 보이는 것이라곤 길 양옆으로 바짝 다가선 산덩이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적어도 밑면적에서는 두 계곡이 거의 같다. 문복능선 속의 계살피골과 수리덤골 등 큰 골짜기가 삼계계곡으로 합류해 들어서는 게 변수다.

그러나 운문사계곡과 삼계계곡 사이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특징이 있다. 저쪽은 막혔고 이쪽은 트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운문사계곡은 수행의 터전이 된 반면, 삼계계곡은 교통 요충지가 됐다.

이 계곡이 틘 것은 그 남쪽 낙동정맥을 넘는 ‘운문령’에 큰 잿길이 났기 때문이다. 덕분에 남쪽의 울산·양산과 북의 청도·경산·대구가 직결된다. 경부고속도로로 인해 사정이 달라지긴 했으나 지금도 창녕·합천·달성 등지서는 이 통로를 통해 울산으로 내왕한다. 대구~울산 간 최단거리 연결로기 때문이다.

삼계계곡 관문인 운문령은 조선 후기 지도에 ‘가슬현’으로 나타나는 그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영남지도’ 청도군도에는 ‘加瑟峴’(가슬현), 언양현도에는 ‘加鋤乙峙’(가서을치)로 돼 있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 주(註)를 통해 ‘가서’(加西·嘉栖)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면서 우리말의 이두식 표기라고 했다. 그렇다면 대구 팔공산 서편 산을 그 가에 있다고 해서 ‘가산’이라 부르면서 ‘架山’(가산)이라 표기하는 것과 같이, 이것 또한 가에 있는 재라고 해서 ‘갓재’라 부르다 ‘가슬현’으로 표기됐는지 모를 일이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 그 길목을 통해 운반된 최고의 생존필수품은 소금이었을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산지인 서해에서 배로 울산까지 운송된 뒤 이 계곡을 거쳐 갈라져 갔다는 얘기다. 신원리 중심 자연마을이 ‘염창’이라 불리게 된 것도 거기 있던 소금창고 때문이라 했다. 그 소금이 내지(內地) 여러 곳으로 분산돼 가던 산길 들길은 ‘소금길’이라 부를 만하다고 누군가가 강조해줬다.

그 길은 거꾸로, 이 계곡 주요 산물을 외부로 날라주던 통로이기도 했을 테다. ‘속계솥’도 이 루트를 통해 서해안까지 보급됐으리라 했다. 운문천과 신원천이 합류해 이루는 무적천 계곡 일대서 생산된 속계솥은 근세 전국 솥 생산량의 70%나 차지한 청도 특산품이었다.

운문령 아래 삼계계곡 최상류 계곡은 ‘생금비리골’이다. 지금은 가게들만 있으나 1960년대에는 살림집도 있었다. 하지만 무장공비들이 숨어들어 1967년 6월 정두표씨 살해사건을 일으킨 뒤 동네가 비워졌다고 했다.

일대 무장공비 사건은 해묵은 것이었다. 1949년 6월에는 토벌 나가던 경찰공무원·행정공무원·소방대장 등 여러 명이 습격 받아 숨졌다. 석 달 뒤에는 공비들이 면사무소와 경찰지서까지 내려와 4명을 살해했다. 그런 와중에서 오진리에선 토벌 과정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는 참사까지 벌어졌다고 했다.

생금비리골의 서편(지룡능선 자락)에는 ‘운문산자연휴양림’이 있다. 겉으로는 있는 둥 마는 둥하나 막상 들어서보면 상당히 넓은 골 안에 자리했다. 그 골 상부에 ‘용미(龍尾)폭포’가 있다. 평소에는 말라붙는 건폭(乾瀑)이지만 겨울에는 얼음이 두텁게 언 빙폭(氷瀑)으로 변해 장관을 이룬다. 그 모습을 보면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저술이 이 폭포서 시작됐다는 전설이 사실로 믿기려 할 정도다.

하지만 문제는 현지 설명서였다. “이 계곡에 천년을 살던 백룡 한 마리가 소원 성취해 승천하느라 서두르다 바위에 걸려 떼어놓고 간 꼬리가 변해 높이 20m의 폭포가 됐다”는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그게 “산두봉 계곡에 있다”는 대목이었다. ‘쌍두봉’이란 이름을 제대로 몰라 ‘산두봉’이라 하고 만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폭포가 쌍두봉계곡에 있다는 설명은 묵과할 수 없는 잘못이었다.

진짜 쌍두봉은 거기서 한참 더 내려간 곳에 있다. 그게 ‘귀산’이라고도 불려온 봉우리들임은 몇 차례에 걸쳐 이미 살핀 바다. 그 모습이 선명히 드러나는 곳은 음식점 ‘쌍두봉가든’ 마당이다. 거기서 보면 쌍두봉은 정말 귀를 닮았다. 귀는 본래 둘이 나란히 솟아야 제 모습이다. 반면 머리가 둘인 ‘쌍두’는 이 세상에 없는 괴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귀산’이라 부르는 게 자연스럽고 더 적합하겠다는 판단이 절로 들었다.

그 ‘쌍두봉가든’ 자리는 삼계마을의 일부다. ‘삼계’는 세 방향 계곡물이 합류하는 지점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라 했다. 운문령 아래 복판 골인 ‘생금비리골’, 동편 문복능선이 품은 ‘계살피골’, 그 맞은편 ‘지룡능선’ 속의 ‘배너미골’ 등이 그것이다.

지금 삼계마을은 깊은 산 속이다. 하지만 이건 자동차시대 눈으로 본 결과일 뿐, 옛날에는 대단한 요충지였다는 게 정설이다. 무엇보다 철(쇠) 생산지였음이 확실하다고 했다. 지금도 곳곳서 발견되는 제철 슬러지가 증거로 꼽힌다. 이곳서 철광석이 났을 뿐 아니라 그걸 녹이기 위한 연료까지 풍부했던 게 제철 입지조건일 것으로 짐작한다. 1800년 즈음 일대에 큰 주물공장들이 들어선 것도 그 전통을 이은 것이리라 보는 시각이 있다.

신라 팽창기에는 거기에 엄청 중요한 시설들까지 자리했다. 원광법사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통해 화랑의 갈 길을 제시해 보인 곳이라는 ‘가슬갑사’가 대표적 존재다. 한 동이 90평이나 되는 큰 건물들을 갖춘 6천여 평짜리 대가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순수 사찰을 넘어 화랑도가 주둔하는 국가기관이자 군사기지 역할을 맡았으리라 보는 시각이 있을 정도다. 삼계마을 입구에 세속오계비 기념 소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쌍두봉가든 일대에도 근래까지 큰 마을이 있었다고 했다. 보이는 모습과 달리 농업 소출이 상당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마을 또한 빨치산 때문에 없어졌다고 했다. 주민들은 그 아래 ‘속계’ 등의 마을로 소개(疏開)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휴양지로 변했으나, 삼계계곡은 저렇게 깊은 역사와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그곳 쌍두봉가든 자리는 배너미골 입구이기도 하다. 그쯤서 출발해 올라가는 ‘배너미재’(506m)는 운문사계곡을 드나드는 가장 중요한 등산통문이다. 운문사 정문을 통한 등산이 막힌 뒤 생겨난 대체 통로 중 이만큼 접근성 좋은 건 더 이상 없다. 가든 옆 ‘천문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르면 35분 정도 만에 지룡능선 위의 배너미재에 올라선다. 출발점 고도가 이미 해발 278m나 돼, 높이 기준으로 230m만 더 올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길도 막바지 구간만 조금 가파를 뿐 대부분 완만하다.

배너미재가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그게 등산로 네거리여서다. 거기로 올라 왼편(남동쪽)으로 꺾으면 가지산 주능선상의 귀바위봉으로 향한다. 그렇게 한 시간쯤 가다가 만나는 도중의 헬기장 봉우리(1,038m봉)서 예각으로 유턴해 돌아서면 쌍두봉 능선이다. 그걸 타고 천문사로 돌아오는 데도 한 시간이면 족하다.

만약 배너미재서 직진해 고개를 넘으면 거긴 운문사계곡 안의 배너미골이다. 그걸 지나 내려서면 ‘천문동’(天門洞) 터에 도달한다. 배너미골-학소대골-아랫재골 등 세 골의 합류점 평지다. 그 지점서는 밀양 산내면으로 이어지는 아랫재까지도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다.

이와 달리 배너미재에서 오른편(북서쪽)으로 길을 잡아 능선을 타면 얼마 후 사리암 산덩이에 올라서고 조금 더 가면 지룡산성 복호산에 닿는다. 그 도중에 지릉을 하나 사이에 두고 배너미골 다음에 자리한 것이 ‘내원골’이고, 그 다음은 ‘삼밭골’이며, 하류 마지막 골은 ‘선(先)삼밭골’이라 했다.

입구에 간이음식점이 세워져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내원골은 그 안이 매우 넓다. 배너미재(506m) 만큼이나 낮은 잘록이(558m)를 사이에 두고 운문사 내원암 쪽 내원골과 연결되기도 한다. 삼밭골은 상황버섯 농장이 들어서 있는 그 골이고, 거기서 골을 따라 조금 내려선 곳에 옛날부터 자리한 동네가 신원리 ‘통점’마을이다. ‘흙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간판 자리에서 오르기 시작하는 선삼밭골은 복호산 정상 봉우리 바로 동편이다. 복호산과 지룡산성 659m봉 사이에 상당히 넓게 펼쳐져 있으며, 거기에 지난번 본 ‘가마바위’가 있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출처 ☞
[대구 매일신문]